2019년 11월 7일 목요일

합정 <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가 내부 공사를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몹시 서운했다. 집에 오는 길에 서운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핸드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2018 4 13 밤에 산책하다가 서양미술사를 처음 발견했다. 아직 이전 가게의 간판(파크부동산) 달려 있었고, 커피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글씨체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겨울,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 덜덜 떨며 가게에 들어 온 내게 사장님은 주문도 받기 전에 따뜻한 잔을 내어주셨다. 손에 잡히던, 손바닥으로 전해지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한다.  퇴사한 날 회사에서 나온 11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합정역으로 향했. 서양미술사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에 맥주 병을 마시고 취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먹은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나의 유일한 나폴리탄 스파게티이자 최고의 나폴리탄 스파게티다.  우유 거품이 가득 올라간 아란치노 잔을 양손으로 사장님을 보고 크게 웃었던 날을 기억한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내게 사장님은 "지혜 님이 이렇게 밝은 분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다음에 갔을  아란치노를 주문해 봤. 오렌지청이 들어간 커피와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꼬인 머릿속을 쾌청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나는 그후로도 아란치노 잔만 보면 웃음이 났다. 옆자리 손님이 친구에게 여기는 핸드드립이 유명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음에 갔을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 커피에 쓴 맛이 전혀 없을 있다는 알게 됐다.  커피를 마시고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날을 기억한다. 포개진 컵을 설거짓거리인 오해하고 사장님을 놀렸던 날을, 맥주를 얻어 마신 날을,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생각의 여름의 <다섯 여름이 지나고> 틀어 두고 깜빡 졸았던 날을 기억한다. 
기억할 거니까. 괜찮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기억이 쌓일 테니까. 그건 또 얼마나 좋을까. 



<서양미술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i_sul_sa/






















































2019년 10월 15일 화요일





손을 유심히 보던 사람이 있었다. 재주 많은 손이라며, 만날 때마다 손을 꼼꼼히 오래 들여다봤다. 손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무엇인 듯이, 마치 손에서 나의 모든 세계를 들여다보듯이. 나는 뼈와 핏줄이 불거진 크고 투박한 손이 창피해서 간지럽다며 서둘러 손을 그에게서 빼내고는 했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자신이 싫어질 , 손가락을 보라고, 그리고 손가락, 손가락 움직여 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사람 생각을 잠깐 했다. 

사람도 가끔 어떤 손을 보면 나를 떠올릴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탐구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전보다 나의 크고 투박한 손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 찬찬히 오래 보아주던 . 사람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벌새》, 아르테 2019.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가족사진






가장 좋아하는 가족사진이다. 책상맡, 책 읽다 고개 들면 눈길 닿는 곳에 두었다. 공부방에 있는 유일한 사진이자 상자에서 꺼내 둔 유일한 가족사진이기도 하다.


84년도 어딘가의 해변이다. 모래에 비스듬히 꽂힌 파라솔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은 엄마와 아빠, 언니가 보인다. 사진 속의 엄마와 아빠는 나보다 5살, 8살 어리다. 그들은 무언가를 막 먹으려는 듯 모여 앉아 있다. 세 사람 모두 수영복을 입었고 아빠와 엄마는 밀짚모자를 썼다. 돗자리 왼쪽 모퉁이에 놓인 모자가 언니의 것이라기엔 커 보인다. 아마 이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의 것일지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  언니가 입은 수영복은 내가 나중에 물려 입기도 했다. 저 수영복을 입은 나의 사진이 이 집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엄마는 2010년 두 번째 결혼을 할 때 가족사진을 모두 나에게 주었다.

나는 자주 이 사진을 들여다 보며 사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2019년 7월 30일 화요일

할머니

화요일마다 가는 카페 사장님이 여름 휴가를 가셨다. "할머니 댁에서 잠을 실컷 자다가 올 생각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좋겠다. 할머니가 있어서.


나는 할머니가 참 좋았다. 우리 가족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아빠가 몰던 파란색 트럭을 타고 할머니댁에 갔다. 운전석에 아빠가 앉고 그 옆에 엄마 언니 내가 차례로 앉았다. 내가 가장 문 쪽에 앉았기 때문에,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끼기긱 소리가 나는 나무 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달려 들어가며 "할머니이-"하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응- 왔어? 꽃비는?"하고 물었다. 할머니의 눈은 작은 나의 정수리 너머 를 향해 있었다. 언니가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오면 할머니는 '꽃비 먹으라고' 찐 옥수수와 '꽃비 먹으라고' 담근 식혜를 마루로 내왔다.

할머니에게 언니는 각별했다. 언니가 네다섯 살 때쯤 엄마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댁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니가 마루에 걸터 앉아 할머니 옆에서 옥수수와 식혜를 먹는 사이,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 선풍기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선풍기 머리에 대고 "아아아아아아아"하고 소리를 내면, 선풍기가 "아아아아아아아"하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매번 꽃비를 찾았고, 매번 꽃비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두었고, 매번 꽃비의 졸업과 입학만 챙겼다. 요즘도 나는 옥수수나 식혜를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가 참 좋았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부모님은 이 년 정도 할머니를 우리집에 모셨다. 입시 준비로 언니가 바쁜 덕분에 나는 할머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밭일로, 논일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살결이 보드랍고 포근했다. 포근한 할머니에게 안기는 게 좋았다. 당뇨 때문에 퉁퉁 부은 할머니 손을 잡고 산책하는 게 좋았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모들 어릴적 이야기가 좋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병원 매점에서 사다주는 인절미가 좋았다. 당뇨 때문에 식단 조절을 해야 하는 할머니가 인절미를 하나 더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좋았다. 엄마 몰래 할머니와 간식을 나눠먹는 게 좋았다. 할머니와 나 둘만 아는 비밀이 좋았다.


할머니댁에 가서 잠을 실컷 자다 올 수 있다면 좋겠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마루에 누워서 "할머니 나 어릴 때 왜 맨날 언니가 좋아하는 옥수수랑 식혜만 해줬어?" "내가 옥수수랑 식혜에 손도 안 대는 거 알았어?" 그렇게 응석도 부리고 싶다. 할머니댁에는 지금 누군가 남이 산다더라. 좋겠다. 할머니가 있어서.









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장류진의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이 작품은 제21회 창비 신인 소설상을 받았다. A4 12장 분량의 소설이 창비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https://magazine.changbi.com/q_posts/%EC%9D%BC%EC%9D%98-%EA%B8%B0%EC%81%A8%EA%B3%BC-%EC%8A%AC%ED%94%94/?board_id=2659
주인공 김안나 씨는 중고 물품 거래 앱 <우동마켓>을 만드는 판교테크노밸리 스타트업 회사의 기획자다. 대표 데이빗(본명 박대식)의 지시로, 김안나 씨는 점심시간에 <우동마켓>에 매일 백 개씩 글을 올리는 의문의 사용자 '거북이알'을 만나 정체를 밝힌다. 거북이알을 만나는 사건 외에도 소설에는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아홉 시까지 김안나 씨가 회사에서 보내는 평범하고 이상한 12시간이 담겼다. "일의 기쁨"은 하찮고 "일의 슬픔"은 뼈아프다.
모든 회사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직장인이라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 그나저나 소설에 나오는 길 건너로 이어지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육교가 판교에 진짜로 있구나! 보러 가고 싶다.

2019년 2월 25일 월요일

안도

낯선 동네로 이사온 지 6년이 지났다.
6년 동안 동네에서 동네로 한 번 이사했다.
지하철역에서 멀어진 대신 집이 넓어졌다.
동네 구석구석 열심히 걸어다닌 덕분에
맛집은 몰라도 좋아하는 골목은 몇 개 생겼다.


오늘은 퇴근길에 부러 돌아 헬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내가 이태원으로 이사한 2013년 4월에 헬카페도 갓 문을 열었다.
헬카페가 입소문을 타고 확장하고 점점 더 유명해지는 동안
동네에는 많은 가게가 생기고 없어졌다.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며
Shazam으로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을 검색해
아이튠즈 보관함에 추가했다.
커피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에서 뚜껑을 열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 아이튠즈 보관함에 추가한 앨범을 들으며
지름길로 집에 돌아왔다.







2019년 2월 24일 일요일

생활기록, 나의 일주일

출근한 지 두 달이 되었다.
시간을 좀 규모 있게 쓰고 싶어서
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일주일 동안 생활 기록을 해봤다.
A4용지를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새로운 활동이 시작될 때 시간을 기록했다.



현재: 독서 18시간/ 사교 3회, 6시간 38분/ 운동 3회, 1시간 51분/ 춤 3회, 6시간 37분/ 잠 1일 평균 6시간 47분

1. 점심시간에 40-45분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퇴근 후와 주말에는 독서 모임 책을 읽었다.
2. 사교활동을 별로 안 했다. 부족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3. 춤은 솔재 수업 한 번, TC 수업 한 번, 스프 수업+소셜 한 번으로 주 3회, 춤 안 추는 날은 짧게라도 운동했다. 
4. 수면 시간은 누운 시간, 일어난 시간을 기록했다. 잠들기 전에 30분, 일어나기 전에 1시간 정도 잠을 설치고 꿈도 많이 꾸는 걸 생각하면 잠이 너무 부족하다.


개선 

1. 점심시간에 박완서 작가 읽기는 유지, 일주일에 한 번은 회사 사람들과 밥 먹자.
2. 퇴근하고 매일 두 시간은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퇴근, 저녁 식사, 집안일'하고 8시엔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3. 독서 모임도 사교활동으로 볼 수 있으니 사교활동 일주일에 3-4회 유지.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약속을 만들자.
4. 춤은 주 3회로 적당하다. 이제 스프 강습이 끝났으니 소셜을 하루 더 하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다. 당분간 유지. 춤 안 추는 날은 운동 꼭 하자. 자기 직전보다 저녁 식사 전후가 나을 것 같다. 
5. 적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들자.


2019년 1월 6일 일요일

2018년을 보내며

지난해는 선우정아 <그러려니>의 가사처럼 만나는 사람이 줄고 그리운 사람이 는 한 해였다.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많은 2018년이지만, 뿌듯한 일도 몇 가지 있다. 솔로재즈 수업을 꾸준히 들은 것, 박완서 소설 전집(세계사)을 읽은 것(22권 중 11권 읽었다), 여성들과 독서 모임에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눈 것, ≪최초의 집≫(유어마인드 2018.) 쓰다가 포기하지 않은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