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우정과 사랑은 같다. 친구는 모두 애인이고, 애인은 가장 친한 친구다. "나 왜 친구 없어?"라고 농담할 때의 '친구'(꼭 농담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그저 아는 사람이나 필요할 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 불러도 될지 궁금할 때,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상상해본다. 각자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을까 떠올려본다. 함께 살기 위해 뜨거울 필요는 없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시간을 내는 '성의', 그거면 충분하다. 성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나에겐 어렵지 않다. 성의로 대하면 되니까. 좋은 친구는 최고의 애인감이고, 좋은 애인은 늘 최고의 친구다. 그러니까 친구가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애인이 될 리는, 애인이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어떤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만들지 못했다면,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성의의 문제다.
"나의 인생은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회고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끝나버린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는 것으로 삶의 찰나를 만끽하고 그것을 반성하는,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회고할 일만 남은 중년 남성으로서의 나 자신을 연민하는 정서에 중독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남자들을 현실 세계에서도 좋아했다는 점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글 쓰는 남자와 음악 하는 남자를 정말로 싫어하는데 그건 당연히 내가 그들과 엮여 망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상에 하지 못할 모험이 없고, 원하지 못할 대상이 없으며, 이루지 못할 꿈이 없다. 일단 다 해버린 다음에 근사한 말로 경험을 치장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며 반성하면 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고 원망하기보다 사고 치고 후회하는 게 나은 세계,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세계를 백인 남자들이 써낸 무수한 소설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큰 그림을 그리는 세계를. 대의,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되어주는 거대한 숙명.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운명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에서..... 음, 아니, 잠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말고는 왜 작품 속에 없는 건데? 그냥 여자 어디 없어요? 여자를 찾습니다." -이다혜 지음,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18쪽, 현암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