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지 학생기자단 14기에서 만든 책으로 한국 여성 건축가 여덟 명의 인터뷰가 실렸다. 교수, 대형사무실 임원,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설계사무소의 소장, 혼자 사무실을 운영하는 소장 등 다양한 상황의 여성 건축가들이 “여성”으로 건축계에서 일한 경험과 함께 건축 작업에 대해 들려준다.
학생기자단 11명 중 10명이 여성이다 보니 모이면 자연스레 ‘졸업 후에 건축계에서 경력단절 없이 일할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누다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한다.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2016) 서문의 한 줄을 오늘도 떠올렸다. "여자가 여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용기를 줍니다.”
비록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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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54살인데, 동기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우리 나이 또래의 여성건축가들이 다 사라졌다고 말해요. 왜 전멸했는가가 이슈인데, 내 나이 또래에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들이 꽤 있었음에도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느라 힘들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요." 22쪽, <강미선>.
"막상 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저 이외에 다른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여성성을 지우려고 했어요. 동기들보다 열심히 해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시기였어요.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다르게 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31쪽, <이선영>.
"제가 교수로서 얼마나 잘 해나가는지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던 거죠. 당시 저는 제 이후에도 여성 교수를 채용하는 기회가 많아질 수 있도록 일에만 집중했어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주목받는 만큼 제대로 자리 잡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고군분투했어요. 후배들, 학생들에게 롤모델이 되기 위해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33쪽, <이선영>
"저는 우리나라 여성 건축사 1호 지순 선생님이 멘토 역할을 해주셔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45쪽, <박영순>.
"보통 30-40대가 커리어에서 정점인데, 그때 육아가 걸림돌이 돼요. 저도 아이 둘은 너무 힘들다 싶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지순 선생님이, '아이들은 엄마의 등을 보고 자란다. 아이들은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 자라니까. 보여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사무소에 가기도 했죠." 48-49쪽, <박영순>.
"많은 부부 건축가가 건축사협회에 등록할 때 둘 다 건축사가 있어도 보통 남편만 해요. 한 사무소에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래도 저는 같이 등록했지요. 공동대표라는 것이 욕심일 수도 있는데, 저는 제 나름대로 권리라고 생각했어요." 61쪽, <김희옥>.
"낮은 연차일 때 여자는 보고서 위주의 작업을 하고 남자는 도면이나 현장 일을 많이 맡게 되었어요. 그걸 객관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작용했던 거 같네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입사 당시 신입사원의 비율은 같았지만 회사에 여자 부팀장이 거의 없었어요. 팀장은 한 명도 없었고요." 77쪽, <이주영>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취직했을 때 '여자라는 이름 뒤에 숨으려 하지 말아라. 여자라서 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회사에 다녔어요. 그때는 모두가 항상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일하는 분위기였고 저도 그렇게 건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불만없이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근무 분위기 자체가 남성적인 문화의 일면이 아닐까 싶어요." 91쪽, <조윤희>.
"작년에 임신을 한 상태로 현상설계공모 발표를 하게 되면서, 제가 임산부라는 사실이 심사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임산부임을 모르길 바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91-92쪽, <조윤희>
"제가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건축계에서 인지도 높은 곳이었지만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80%밖에 되지 않았어요." 99쪽, <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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