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초반의 서울, 미군 PX 초상화부 점원인 이경이 주인공이다. 이경을 둘러싼 세계(고가와 어머니가 상징하는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망령에 사로잡힌 부연 회색빛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하고픈 마음,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열망이 있다. 초상화부는 미군을 상대로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으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 중 한 명인 옥희도 씨(박수근 작가가 모델인 인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경의 일터인 충무로의 PX와 계동의 고가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경의 퇴근길을 묘사한 장면.
"나는 종종걸음으로 어두운 모퉁이를 재빨리 벗어나 환한 상가로 나섰다. PX를 중심으로 갑자기 발달한 미군 상대의 잡다한 선물 가게들ㅡ사단이나 군단의 마크를 수놓은 빨갛고 노란 인조 머플러, 담뱃대, 소쿠리, 놋그릇,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런 가게 앞에서 나는 기웃거리며 될 수 있는 대로 늑장을 부리다가 어두운 모퉁이에서는 숨이 가쁘도록 뜀박질을 했다.
그러한 번화가인 충무로조차도 어두운 모퉁이, 불빛 없이 우뚝선 거대한 괴물 같은 건물들 천지였다. 주인 없는 집이 아니면 중앙 우체국처럼 다 타버리고 윗구멍이 뻥 뚫린 채 벽만 서 있는 집들, 이런 어두운 모퉁이에서 나는 문득문득 무섬을 탔다.
어둡다는 생각에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겹쳐오면 양키들 말마따나 갓댐 양구, 갓댐 철원, 문산 그런 곳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너무도 가까운 것 같아 나는 진저리를 치며 무서워했다.
나는 그런 곳에서 좀 더 멀리 있고 싶었다. 적어도 대구나 부산쯤, 전쟁에서 멀고 집집마다 불빛이 있고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곳에 있고 싶었다.
나의 빨랐다 느렸다 하는 걸음은 을지로를 지나 화신 앞에서부터는 줄창 뜀박질이 되고 말았다.
외등이라든가 구멍가게라든가 그런 아무런 표적도 없는 죽은 듯이 어두운 비슷한 한식 기와집 사이로 미로처럼 꼬불탕한 골목길을 무섭다는 생각에 가위눌리면서 달음박질쳤다.
드디어 집이 가까워지면서 어둠만이 보이던 나의 눈에 별이 박힌 부연 하늘이 들어오고, 그 부연 하늘을 이고 서서 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나간 채인 우리 집의 지붕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보인다."
19-20쪽.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1930년 10월 24일 개점)을 한국전쟁 당시 미군 PX로 사용했다. 현재 신세계 본점 건물.
미군 PX
출처: Dewey McLean의 Flickr 앨범 <Korean War Memories 1951-1953>
중앙우체국
출처: Dewey McLean의 Flickr 앨범 <Korean War Memories 1951-1953>
화신백화점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여러분의 백화점·화신·경성본점·평양지점, 조흔물건싸게파는←전조선화신연쇄점>,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㊼(㊼) 화신백화점 설계한 근대건축 선구자>,
한겨레신문, 1990년 11월 16일자.
그외에도 공간 배경으로 낡은 일본식 이층집인 태수의 집과 기왓집인 옥희도 씨의 집, 명동, 이경이 결혼 후 고가를 헐고 새로 지은 양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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