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9일 목요일
세세한 대화가 그와 나를 친구로 이끌 확률.
그가 내게 왜 손가락에 밴드를 붙였는지 물었다. 그냥 다쳤다고 간단히 대답해도 될 일을, 엄마에게 전복을 받은 일이며, 전복을 손질하는 방법, 어느 단계에서 손을 베었는지, 그렇게 해 먹은 요리가 어땠는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열심히도 들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건 처음이었다.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는 이제 그가 새우를 먹을 때 머리와 꼬리만 떼고 통째로 먹는다는 것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 또 그가 한솥에서 도시락 값을 떼먹은 적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바나나우유를 한 단지, 나는 커피우유를 두 팩 마셨다.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며 오늘 고민하다 빠에 왔는데 나를 봐서, 나와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다며 오길 잘했다고 했다. 능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졌다. 어색하지만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더 가까운 말로 느껴졌다. 마음과 말의 거리가 짧게 느껴지는 사람과의 대화는 안심이 된다. 진심일까 의심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쩌면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간
오랜 친구와 타코를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눴다. 나는 서운함과 설렘, 권태를 이야기했고, 친구는 기대와 겁, 헛헛함을 이야기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서로의 쓸쓸함을 실컷 어루만졌다. 카페에서 나와 선릉까지 함께 걸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근래 어느 날보다 기분이 좋았다. "산책과 대화. 내가 원하는 건 이것뿐"이라고 말했다. 친구는 "그렇지, 그게 전부지 뭐"라고 했다.
2018년 8월 5일 일요일
박완서 지음, <나목>, 세계사 2012.
<나목>은 1970년 박완서의 나이 40세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모집에서 당선된 데뷔작이다.
1950년대 초반의 서울, 미군 PX 초상화부 점원인 이경이 주인공이다. 이경을 둘러싼 세계(고가와 어머니가 상징하는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망령에 사로잡힌 부연 회색빛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하고픈 마음,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열망이 있다. 초상화부는 미군을 상대로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으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 중 한 명인 옥희도 씨(박수근 작가가 모델인 인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경의 일터인 충무로의 PX와 계동의 고가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경의 퇴근길을 묘사한 장면.
"나는 종종걸음으로 어두운 모퉁이를 재빨리 벗어나 환한 상가로 나섰다. PX를 중심으로 갑자기 발달한 미군 상대의 잡다한 선물 가게들ㅡ사단이나 군단의 마크를 수놓은 빨갛고 노란 인조 머플러, 담뱃대, 소쿠리, 놋그릇,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런 가게 앞에서 나는 기웃거리며 될 수 있는 대로 늑장을 부리다가 어두운 모퉁이에서는 숨이 가쁘도록 뜀박질을 했다.
그러한 번화가인 충무로조차도 어두운 모퉁이, 불빛 없이 우뚝선 거대한 괴물 같은 건물들 천지였다. 주인 없는 집이 아니면 중앙 우체국처럼 다 타버리고 윗구멍이 뻥 뚫린 채 벽만 서 있는 집들, 이런 어두운 모퉁이에서 나는 문득문득 무섬을 탔다.
어둡다는 생각에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겹쳐오면 양키들 말마따나 갓댐 양구, 갓댐 철원, 문산 그런 곳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너무도 가까운 것 같아 나는 진저리를 치며 무서워했다.
나는 그런 곳에서 좀 더 멀리 있고 싶었다. 적어도 대구나 부산쯤, 전쟁에서 멀고 집집마다 불빛이 있고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곳에 있고 싶었다.
나의 빨랐다 느렸다 하는 걸음은 을지로를 지나 화신 앞에서부터는 줄창 뜀박질이 되고 말았다.
외등이라든가 구멍가게라든가 그런 아무런 표적도 없는 죽은 듯이 어두운 비슷한 한식 기와집 사이로 미로처럼 꼬불탕한 골목길을 무섭다는 생각에 가위눌리면서 달음박질쳤다.
드디어 집이 가까워지면서 어둠만이 보이던 나의 눈에 별이 박힌 부연 하늘이 들어오고, 그 부연 하늘을 이고 서서 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나간 채인 우리 집의 지붕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보인다."
19-20쪽.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1930년 10월 24일 개점)을 한국전쟁 당시 미군 PX로 사용했다. 현재 신세계 본점 건물.
미군 PX
출처: Dewey McLean의 Flickr 앨범 <Korean War Memories 1951-1953>
중앙우체국
출처: Dewey McLean의 Flickr 앨범 <Korean War Memories 1951-1953>
화신백화점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여러분의 백화점·화신·경성본점·평양지점, 조흔물건싸게파는←전조선화신연쇄점>,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㊼(㊼) 화신백화점 설계한 근대건축 선구자>,
한겨레신문, 1990년 11월 16일자.
그외에도 공간 배경으로 낡은 일본식 이층집인 태수의 집과 기왓집인 옥희도 씨의 집, 명동, 이경이 결혼 후 고가를 헐고 새로 지은 양옥이 나온다.
너무 많은 죽음
목을 매달았다니. 전해들었을 뿐인데,
죽음의 모습을 직접 본 듯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어 더 괴롭다.
목을 매단 나무 아래에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더란다.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희망이 없는 사람의 심정을 떠올린다.
꿈자리가 사납더니
아침에 요리하다 손을 두 번 베었다.
너무 많은 죽음이 나의 생에 스며있다.
죽음의 모습을 직접 본 듯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어 더 괴롭다.
목을 매단 나무 아래에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더란다.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희망이 없는 사람의 심정을 떠올린다.
꿈자리가 사납더니
아침에 요리하다 손을 두 번 베었다.
너무 많은 죽음이 나의 생에 스며있다.
2018년 8월 3일 금요일
씩씩한 지혜 씨.
풀 죽은 내게
친구가
"넌 참 씩씩해"라며
아래 사진을 보내줬다.
그리고
아래는
같은 친구가 3년 전에 찍어준 사진.
가장 좋아하는 내 사진.
씩씩한 내가 마음에 든다.
난 참 씩씩해.
2018년 7월 28일 토요일
성의의 문제
나에게 우정과 사랑은 같다. 친구는 모두 애인이고, 애인은 가장 친한 친구다.
"나 왜 친구 없어?"라고 농담할 때의 '친구'(꼭 농담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그저 아는 사람이나 필요할 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 불러도 될지 궁금할 때,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상상해본다.
각자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을까 떠올려본다.
함께 살기 위해 뜨거울 필요는 없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시간을 내는 '성의', 그거면 충분하다. 성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나에겐 어렵지 않다. 성의로 대하면 되니까. 좋은 친구는 최고의 애인감이고, 좋은 애인은 늘 최고의 친구다.
그러니까 친구가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애인이 될 리는, 애인이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어떤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만들지 못했다면,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성의의 문제다.
"나 왜 친구 없어?"라고 농담할 때의 '친구'(꼭 농담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그저 아는 사람이나 필요할 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 불러도 될지 궁금할 때,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상상해본다.
각자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을까 떠올려본다.
함께 살기 위해 뜨거울 필요는 없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시간을 내는 '성의', 그거면 충분하다. 성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나에겐 어렵지 않다. 성의로 대하면 되니까. 좋은 친구는 최고의 애인감이고, 좋은 애인은 늘 최고의 친구다.
그러니까 친구가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애인이 될 리는, 애인이 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어떤 두 사람이 아무 관계도 만들지 못했다면,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성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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